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8세 (문단 편집) == 후계 문제 == 1028년 11월이 되자 콘스탄티노스의 건강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. 제국에서는 [[바실리오스 2세]] 시절부터 문제였던 후계자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. 바실리오스 2세가 자식이 없어서 그 동생이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, 그 황제에게도 아들이 없었다. 황제에게는 알리피오스의 딸 [[엘레니 알리피아]]와의 사이에서 딸이 3명 있었는데, 맏이인 에브도키아는 (천연두를 앓았으나 당시 기준으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.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가 생겨) 평생토록 수녀원에서 종교적 삶을 살고 있었고, 둘째 딸 [[조이(로마)|조이]]는 26년전에 이탈리아로 결혼하러 갔다가 [[오토 3세|약혼자]]가 열병으로 죽어버린 덕분에 황궁의 규방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여동생 [[테오도라(11세기)|테오도라]]와 함께 살고 있었다. 서방과는 다르게 여성도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특성상 조이를 통해서 남편이 제위를 물려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. 하지만 그게 누가 될 건지에 대해서는 다 죽어가는 황제의 침대 맡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콘스탄티노스는 결국 황실에 충성도 깊고 능력과 시민들의 지지가 상당한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(Konstantinos Dalassenos)를 둘째 딸 조이와의 공동 후계자로 낙점했다. 하지만 당시 그는 1024년 이래로 [[안티오키아]] 도독(Doux of Antiocheia)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. 그렇기 때문에 제위가 비어 있는 위험한 시기에 계승하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았다. (혹은 원로원파가 군인 출신 황제를 꺼렸다는 주장도 있다) 결국 새로이 결정된 후보는 [[로마노스 3세|로마노스 아르이로스]](Romanos Argyros, 968년 ~ 1034년 4월 11일), 콘스탄티노플 시장이었다. 콘스탄티노스는 즉각 로마노스를 병석으로 불러들여 [[이지선다|아내와 이혼하고 조이와 결혼하여 제위를 승계할 것인지 아니면 두 눈을 잃을 것인지]] [[고자되기|선택하도록 강요했다.]] 결국 아주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로마노스는 기존의 아내와 이혼 절차를 밟은 뒤, 로마 황제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